당신이 이 글을 읽게 된 이유는, 이 글을 읽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자신이 이 제목을 보고 글을 읽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이처럼 자신의 독립이고 주체적인 결정으로 인해 어떠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개념을 자유의지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자유의지는 당연히 존재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의지는 과학 및 철학계에 걸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해, 특히 물리학과 자유의지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뉴턴이 쏘아올린 작은 공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뉴턴이 등장하기 전의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뉴턴의 등장으로 상황이 좀 바뀌었다. 비단 과학계와 수학계뿐만 아니라 철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뉴턴의 고전역학 때문이다. 여기서 고전역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으나, 가장 중요한 핵심만 정리하면 이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물리법칙을 통해 예측될 수 있다.’ 이 ‘모든 현상’이란 단순히 쏘아 올려진 대포알이나 행성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 역시 물리법칙 아래에 존재해야 했기 때문에, 인간은 선택 역시 전부 (원칙적으로는) 예측될 수 있었으며, 이는 인간의 결정과 행동이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시가 바로 라플라스의 악마이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제안한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그는 ‘만약 한 존재가 온 우주의 운동 상태를 원자 단위까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 존재는 현재를 넘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고, 이 대상은 이후 ‘악마’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정보’에 인간의 결정 또한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유의지는 마치 허상과 같은 존재로 치부되어 왔다. 떨어지는 사과에서 시작된 물리적 발견이, 어느새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 깊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자유의지의 구원자, 양자역학
인간을 자유의지를 상실한 기계의 자리에서 해방시킨 것은, 의외로 또 한번 물리학이었다. 190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과학계를 휩쓸었던 양자역학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물리법칙을 붕괴시켰다. 역시 자세히 다루기는 어렵지만, 양자역학이 지닌 함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자연에 완전한 무작위성이 존재한다.’ A라는 원인에 의해 항상 결과 B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A로 인해 B도 일어날 수 있고, C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직접적으로 변호하지는 못했지만,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약화시키는 데에는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
논의의 종착점
현대 학문은 양자역학으로 발생한 비결정성을 곧장 자유의지의 증명으로 보지는 않는다. 라플라스적 세계관에 대한 합당한 비판을 제시했을 뿐이다. 현대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물리적 수준이 아닌 행위자 수준에 대해 진행되고 있다. 단순히 ‘이 사건이 결정되어 있었는가?’를 넘어, ‘이 사건이 행위자에게 어떤 사건인가?’로 질문을 바꿔가고 있다. 물리학적 수준을 넘어, ‘이유에 반응하며 행동을 조절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가?’가 현대 자유의지 논의의 주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물질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층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윤리, 법, 정치, 심지어 일상적 책임의 문제까지 확대된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당화하는가’에 대한 실천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자유의지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 책임과 사회 제도의 정당성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로 인해 자유의지는 이론적 개념을 넘어 판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넘어, 우리 사회의 구성과 유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