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껍질을 벗기자, 사고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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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평가의 독서 영역을 공부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언어철학이라는 세계를 접했다. 그전까지 나는 ‘까만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다’식의 독해법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문장의 논리 구조나 핵심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글자만 따라가며 읽었다. 글을 ‘읽는다’고 착각하며 사실은 ‘흘려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 단순한 독해의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조적·논리적 독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이 인식의 변화가 언어철학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었다. 이후, 명제·논리 구조·필요충분조건 같은 분석 틀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사고와 언어는 함께 진화한다: 구성주의 인식론과 언어 상대성 이론

수능 독서를 공부하며 글의 구조와 논리를 따지는 훈련을 하다 보니, 점점 언어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사고의 틀을 형성한다는 사실에 관심이 생겼다. 이 인식은 수능 독서 영역에 그치지 않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은 객관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 속에서 구성된 현실을 인식한다. 즉,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정하는 이다. 따라서 우린 언어를 익히면 익힐수록 식견이 넓어지고 세상을 보다 더 넓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더 뚜렷한 사고와 함께 해상도 높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인식은 단지 표현 수단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언어의 구조와 체계는 우리의 사고 방향을 미묘하게 조정하고, 세계를 분류하는 방식을 달리 만든다. 이런 구조적 차이가 현실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실제 언어 사용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파란색을 연파랑(goluboy)과 진파랑(siniy)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언어적 분화는 색감 인지에도 영향을 미쳐,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파란색의 음영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구분한다.

이와 반대로, 필자의 아버지는 파란색과 초록색을 모두 푸른색으로 통칭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어릴 적 필자는 신호등의 색깔을 무의식적으로 푸른불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후 ‘신호등이 빨간색과 노란색 그리고 무슨 색이었더라?’하며 초록색과 파란색을 헷갈리게 되었다. 이는 언어적으로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본래 갖고 있는 색감 구분 능력조차 저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결정짓는다는 강한 언어 결정론은 현대 언어 철학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언어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과 세부 인식을 달라지게 만든다.

그림1. Languages have different categorical distinctions which subsequently influences how we see the world (출처 Winawer et al., 2007; Thierry et al., 2009)

우리는 언어게임 중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인식은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조 같은 표면적 요소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언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본질적인 차원에서도 우리의 사고를 규정한다. 이와 관련하여 언어를 고정된 의미의 집합이 아닌 ‘사용 방식’의 총합으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 이론은 중요한 통찰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일종의 ‘놀이 규칙’을 따르는 행위이다. 마치 야구는 야구만의 룰이 있고, 축구에는 축구만의 룰이 있듯이 말이다. 우리가 감정, 명령, 사과 등 여러 상황에서 쓰는 언어 또한 각각의 맥락과 규칙이 있기 때문에 그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이 불가하다. 즉, 언어는 고정된 본질이나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잘하자.”라는 말은

  1. 일상 대화: 함께 노력하자는 긍정적인 의미
  2. 비꼬는 말투: “지금 너 별로야, 그러니 똑바로 잘 좀 하자?”는 반어적 비판

즉, ‘잘하자’라는 표현의 의미는 단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용된 언어 게임 안에서만 결정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점을 “언어의 의미는 정의가 아니라 사용이다.(meaning is use)”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물음이 떠오른다. 언어의 구조와 어휘, 그리고 사용 방식에 따라 세계 인식이 달라진다면,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들이, 단지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조차 부정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언어 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언어 게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이는 즉 사회적 맥락에서 공유되지 않는 것이며,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며 소외되고 사라져버린다.

그림2. The Party recognizes that words have power, which is why they try to manipulate the thoughts of their citizens by changing the language to Newspeak. (출처 Newspeak in 1984 by George Orwell | Definition, Examples & Quotes
Kristin Wilson, Liz Breazeale, 2023)

조지 오웰의《1984》와 뉴스픽(Newspeak)

조지 오웰은 1949년에 발표한 디스토피아 소설《1984》에서 전체주의 정권이 ‘사고를 통제’하기 위해 가상의 공식 언어인 뉴스픽(Newspeak)을 도입하여 언어를 조작하는 방식을 그려냈다. 뉴스픽은 기존 언어를 점점 축소하고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여 결국 정부에 대한 반대 개념을 언어로조차 표현할 수 없게 만든 새로운 언어다.

나쁜(bad)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신 단순히 ‘비좋음(ungood)’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게 만든다.
‘훌륭한(excellent)’이나 ‘멋진(brilliant)’ 같은 다양한 긍정 표현도 모두 사라지고,
‘더 좋음(plusgood)’이나 ‘최고 좋음(doubleplusgood)’ 같은 단조로운 어휘로 대체된다.

이렇게 되면 뉘앙스와 감정의 미세한 결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단순한 감정과 사고만 할 수 있게 된다.
즉, 언어를 단순화시키는 건, 곧 사고를 평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림3. Newspeak examples (출처 What Is Newspeak and Is It Now A Reality?, sporcle blog, 2017)

언어의 한계: SMCR 모델로 보는 왜곡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고, 우리는 언어로 인식한다. 결국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틀 안에서 세계를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언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표면적 단어 선택뿐만 아니라 그 구조와 맥락, 심지어 사회적 약속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다. 즉, 언어는 본질을 담고 있지 않고, 우리가 만들어낸 약속의 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결국 ‘표현의 한계’ 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단지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할 때조차, 그 표현이 본질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불완전한 언어에 의존하여 나를 설명한다면 표현은 자연스럽게 ‘나’의 본질에서 어긋나기 마련이다. 결국 언어에 기대는 순간 나는 왜곡되기 시작한다.

정보 전달의 구조: SMCR 모델

이 경험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보 전달의 구조를 설명하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인 ‘SMCR 모델’을 보면, 정보 전달은 네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Sender(발신자), Message(전달하려는 정보), Channel(전달 수단), Receiver(수신자)로 구성된다.


이는 누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전달하느냐를 분석하는 틀이며, 단순히 송신자와 수신자 간의 메시지 이동에서 더 나아가 메시지의 내용과 미디어의 종류까지 생각한 모델이다.

그림4. 정보원(S)이 메시지(M)를 특정한 채널(C)을 통해 수신자(R)에게 보내면 수신자는 그에 대한 영향(E)을 받는다는 것이 기본 골자 (출처 chat gpt)
** reciever -> receiver

‘나’라는 사람은 Sender이고, 나에 대한 설명은 Message,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Channel은 바로 언어다.
그런데 이 언어는, 불완전하고 자의적인 기호의 조합일 뿐이다. 내 안의 어떤 감정도, 사고도, 언어라는 채널을 통과하는 순간
축소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문제는 Receiver는 이 찌그러진 메시지를 가지고 나를 판단(Effect)한다는 것이다. 즉, Channel 단계 이후의 모든 단계에서 온전한 Message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나를 설명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해석된 나’를 전달한 셈이다.
그러니 언어에 기대는 순간부터 나는 내 본질과 조금씩 어긋난다. 표현은 늘 부족하고, 의미는 자꾸만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나 자신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말 대신 ‘시간’을 선택하기도 한다. 함께 지내며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버릇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언어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용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표현은 언제나 사고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성은 오히려 언어 철학의 본질적 미학을 드러낸다.

언어의 제약을 인식하는 순간,
그 제약이 작동하는 구조와 그로부터 형성된 사고의 조건들까지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곧 언어를 ‘전달의 수단’으로 간주하던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
언어 자체가 세계 인식의 구조적 장치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언어 철학은 언어를 더 잘 쓰게 만드는 학문이 아니라,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성찰하게 됨으로서
세계를 더 해상도 높게, 더 정교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태도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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