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학자’라는 이름의 직업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고는 한다. ‘과학자’, ‘철학자’처럼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부터 ‘법의학자’, ‘생화학자’처럼 조금 낯선 이름까지. 자신을 ‘~학자’로 소개하는 사람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학생들이 커서 과학자/수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모습 또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학자’는 꽤 이상한 직업이다.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직업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자’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 직업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학자’를 직업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걸까?”
학자의 기원
학자(scholar)라는 단어는 ‘여가’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σχολή’로부터 유래했다. 괜히 고대 그리스가 아니다. ‘σχολή’의 의미는 여가, 즉 ‘남는 시간에 하는 활동’이라는 뜻에서 ‘토론’이나 ‘강의’와 같은 뜻을 거쳐 ‘학문’의 의미로 변화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냥 나온 게 아닌가 보다. 여기서 ‘σχολή’가 라틴어 ‘schola’로 옮겨지며 비로소 학교, 학문 공동체 등과 같이 현대적인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학자의 역할과 현실
그럼 ‘학자’가 정말로 하는 일은 무엇일까? 단순히 기존의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일까? 이는 학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 학자의 본질적인 역할은 아니다. 학자는 기존의 지식을 아는 것을 넘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내는 사람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주로 지적인 사유를 통해,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정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잠재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이 바로 학자의 역할이다.
사람들은 학자에 대한 과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수많은 학자들을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다. 우리는 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 뉴턴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를 보며 ‘학자’라는 이미지를 투영한다. 천재성을 통해 자신의 분야를 자유롭게 탐구하고,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기며,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모습이 우리가 아는 ‘학자’의 표준이다. 애초에 그렇지 않은 학자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학자의 정의로 돌아가 보자. 학자는 지식을 생산하여 잠재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잠재적인’ 가치이다. 학자 개인이 생산한 지식이 곧바로 표면적인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발표 당시 숱한 비판에 시달리던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현대 생물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인류의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대에 기여하였다. 당시에 ‘위대한 학술적 발견’ 정도였던 뉴턴의 고전역학은 현재 우주 탐사를 비롯한 과학 전반에 사용되며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다. 다소 극단적인 예시들이지만, 우리는 이들을 통해 연구, 즉 지식의 생산은 ‘투자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투자적인 성격으로 인해 학자는 개인 단위로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구에 드는 비용은 있지만 연구의 보상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학자는 주로 자본력을 가지고 있는 큰 규모의 기관에 소속되어, 연구비를 받으며 연구하게 된다.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기관들이 학자에게 투자하고, 학자는 연구로 인해 발생하는 잠재적인 가치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주로 을의 관계에 있게 된다. 연구 기관은 최소한의 비용을 투입해 최대한 많은 가치를 창출하고자 할 테고, 학자들은 이들의 요구에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만큼 큰 자율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자율성의 상실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필연적으로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복잡한 과정과 경쟁이 발생하게 된다. 현대에는 흔히 대학원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대학을 졸업한 후, 즉각적인 취업을 포기하고 대학원에 입학해야 한다. 석사 과정을 거치고도 매력적인 연봉의 일자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랜 기간을 거쳐 박사과정을 거친 후에는 불안정한 포닥 생활이 이어지고, 그 후에나 흔히 정말 안정적인 ‘직업으로서의 학자’, 즉 교수가 될 수 있다. 물론 교수가 되었다고 사람들이 정말로 꿈꾸는 학자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연구에 있어 완전한 자율성이 보장된다고 보기 어려우며, ‘하고 싶은 연구’와 ‘돈이 되는 연구’ 사이에서 씨름하게 된다. 이것이 ‘학자’ 보다는 ‘교수’나 ‘연구원’이 직업의 명칭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유이다. 직업으로서의 ‘학자’를 실질적으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꿈꾸는 ‘학자’의 현실이다. 자신의 분야에 몰두하며 자신의 삶을 쏟아붓는 멋있는 직업이 아닌,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자리한 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학자의 현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학자가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인류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다’라는 자부심, 다르게 말하면 낭만이다. 비록 현실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 속에서 비현실적인 질문을 멈추지 않고, 나의 연구가 훗날 어떠한 형태로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한 ‘직업’이 아닌 ‘태도’로서의 학자이자, 내가 학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이다.





